상전벽해,벽해상전은 정확히 미래의 잠실을 두고 과거에 생겨난 사자성어인 양, 잠실엔 뽕밭과 누에를 치는 잠사가 많았고 푸른 물이 흐르는 강과 섬이었다.
70년대 강남개발로 매립된 잠실 사거리는 롯데월드다. 그야말로 롯데 세상이다. 롯데월드,롯데백화점,롯데호텔,롯데매직아일랜드 에 현재는 코아 가 70여층 올라간 제2롯데월드타워(123층,555미터 높이 계획) 까지 가세한 상태다.
이 지역은 옛부터 한강의 송파나루터가 있었고 50년대까지 배가 다녔다고 한다. 위 1920년대 지도에 보면 잠실도,부리도 라는 지명이 나오고 거기에 과거에는 삼전도(三田渡, 현 삼전동)라는 구릉이 있었던 모양이다.
한강의 본류를 막아 만든 석촌호수 서호(西湖) 입구에는 삼전도비(三田渡碑)가 있다. 1983년 송파대로 확장때 송파구 석촌동 289-3 삼전도비 어린이 공원내로 이전하고 2010.4월 고증을 통해 당시 가장 근접한 위치 잠실동 47번지로 옮겨왔다고 한다.
현 삼전도비는 총높이 5.7m(비신 3.95m)에 이르는 매우 커다란 비석으로, 옆에 비신이 없는 또 하나의 귀부가 옮기는 장소에 따라 좌측에 있거나 우측에 따라다닌다. 귀부가 두 개인 이유가 궁금해 자료들을 찾아 보니 '더 크게 만들라는 청나라측의 변덕' 이라는추측이 있으나 전혀 근거가 없고, 인근 어떤 용도의 폐기된 비석의 귀부가 어느 시기 합류해 함께 한 것으로 보인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01호로 지정된 삼전도비는 조선 인조 17년(1639년12월)에 세워졌으며 당시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현재 비신에 써진 명칭)'로 한강의 높은 언덕(삼전도)위에 누각을 짓고 계단을 쌓은 단(檀)위에 세워졌다.
1895년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치욕스런 흉물이라 하여 넘어 뜨려 방치한 것을 1913년 일본이 다시 세우고 1916년 '고적급유물보존규칙'이 제정되자 삼전도비를 '등록번호 제11호'로 등재했다. 다시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1935년 '삼전도 청태종공덕비'란 명칭으로 국보 제164호(당시는 국보,보물이 분리되지 않았음.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 187번지)에 지정했다.
해방후 1955년 '국보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에서 치욕의 산물로 규정 1956년 지하에 매몰하고 1957년 고적 제147호 '삼전도 청태종공덕비지(터)'로 지정했다. 1963년 재정된 문화재보호법으로 발굴, 사적 제101호로 재분류. 1981년 '삼전도 청태종공덕비'가 '삼전도비'로, 지금은 '서울 삼전도비'로 이름돼 있다.
2007년에는 백모씨에 의해 병자호란 후 370년이 흘렀다는 뜻의 '철거 370 병자'의 붉은 페인트 글씨가 칠해진 적도 있으나, 자체만의 완성도로 본다면 한국에서 손꼽을 수 있는 예술이다. (龍)
※ 삼전도비[三田渡碑]- 브리태니커 등
1639년(인조 17)에 한강의 상류인 삼전도(지금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에 세운 청(淸)태종의 공덕비.
사적 제101호. 비신 높이 395㎝, 너비 140㎝. 이수(螭首)와 귀부를 갖춘 커다란 비. 비문에 새겨져 있는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고립되었던 인조가 삼전도에서 직접 청태종(청태조 누루하치의 8번째 아들 홍타이지) 에게 항복한 사실을 담아 세우고 이것을 대청황제공덕비라고 했다. 당시 청태종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울에 침입하여 삼전도에서 진을 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를 포위 공격하여 마침내 항복을 받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사실을 영원히 기념하려는 청태종의 강요에 의해서 세워졌다.
당시 인조는 이마에 피가 나도록 머리를 땅을 찧으며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치욕을 당했다고 한다.
당시 비문은 이경석(李景奭)이 짓고, 오준(吳竣)이 해서로 썼으며, 여이징(呂爾徵)이 새겼다. 비의 표면 왼쪽에는 몽골문으로, 오른쪽에는 만주문으로, 그리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사방 7품의 해서로 씌어진 우리 민족의 치욕적인 역사기록이다
http://m.seoulpost.co.kr/news/27096 에서 퍼옴... 개인적으로 볼 내용이니 펌하실거면 본 사이트에 가셔서 퍼가시든지 하세요...
석촌호수 동호 남단 서쪽은 예전 ‘송파나루’가 있었던 곳이다. 본래 이곳은 한강의 본류였다. 옛날 잠실 쪽 한강에는 토사가 쌓여 형성된 부리도(浮里島)라는 섬이 있었는데 부리도를 중심으로 남쪽 물길과 북쪽 물길, 즉 송파강과 신천강을 이루는 샛강이 흘렀다. 1971년 4월 부리도의 북쪽 물길을 넓히고 남쪽 물길을 폐쇄하는 등 섬을 육지화하는 대공사가 시작되기 전 일이다. 물막이 공사를 하면서 한강의 물줄기는 바뀌었다. 섬이었던 잠실을 육지로 만들어 도시화했고, 상습적인 강물 범람 지역에 제방을 쌓아 물줄기를 직선화했다. 퇴적물이 더 쌓이는 것을 막으면서 홍수 재난까지 피할 수 있었다. 그때 폐쇄한 남쪽 물길을 남겨놓았다가 1980년대 초 호수공원으로 정비한 게 석촌호수다.
송파나루는 서울과 남한산성·광나루에서 약 5km씩 떨어져 있던 교통 중심지였다. 경기도 광주의 읍치(읍소재지)가 남한산성으로 옮겨진 1636년 병자호란 직후부터 서울과 삼남 지방, 경기도 광주, 강원도를 잇는 중요한 나루터가 됐다. 땔나무와 담배·쌀·숯·소·곡식·채소·어물 등을 서울에 공급했다. 이곳을 거쳐간 물건이 많아 ‘임금님께 진상하는 꿀병도 송파를 거친다’는 속담이 생겼을 정도다. 당시 송파는 나루터보다 시장으로서의 기능이 더 컸는데 송파장은 조선시대 전국 10대 상설시장 중 하나로 꼽혔다. 하지만 1925년 을축년에 있었던 대홍수와 광진교 신축으로 배 없이도 서울 통행이 쉬워지는 등 교통이 발달하면서 송파의 시장기능은 쇠퇴했다. 나루터는 1960년대까지 뚝섬과 송파를 잇는 정기선이 운항돼 그 명맥을 유지했으나 1960년대 말 강남 지역 개발이 진행되면서 샛강 매립과 교량 건설로 인해 나루터 기능까지 잃게 되었다.
석촌호수 동호 남쪽 언덕에 오르면 송호정(松湖亭)이라는 정자가 있고, 부근에 송파나루 유래에 관한 내용을 새긴 ‘송파나루터(松坡津址)’ 비석이 있다. 과거 이곳이 나루였다는 흔적을 간직한 비석이다. 하지만 송파대로변에 있어 그곳에 비석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날도 ‘지금의 석촌호수가 있기까지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비석이 산책로나 조경로에 있다면 좀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석촌호수를 거닐 때마다 인근 놀이공원에서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환호성이 들린다. 송파나루가 있던 그 옛날에도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며 멱을 감지는 않았을까. 동네 꼬마들이 뛰어 놀던 한강이 지금의 놀이공원으로 이어져 우리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송파장은 가락동농수산물시장으로 이어져 전국 농수산물이 이곳을 거쳐가고, 송파나루는 교통 중심지인 지금의 잠실로 이어져 과거와 현재가 맞닿아 있는 듯 느껴진다.
글=김혜경 (송파문화원 문화해설사)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7621836 에서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