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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미국 비밀 문서 속 '김대중 파일' ;;;; 갑자기 비밀문서를 왜 내놓은거지;;

by 맨도리쓰 2010. 11. 30.
“돌아보면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의사당에 앉는 데까지 9년, 1970년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후 대통령이 되기까지는 무려 27년이 걸렸다. 대통령 후보, 야당 총재, 국가 반란의 수괴, 망명객, 용공분자 등 나의 호칭이 달라질 때마다 이 땅에는 큰일이 있었다.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김대중 자서전> 1권 22쪽, 생의 끄트머리에서). 8월18일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내 자서전은 반드시 사후에 내라”는 김 전 대통령의 유지에 따라 서거 1주기를 앞둔 7월29일 <김대중 자서전>(도서출판 삼인)이 출간됐다.
 
한국 현대사에서 미국은 단 한순간도 한국에서 눈을 뗀 적이 없다. 가깝게는 해방 이후 미 군정 때부터, 멀게는 1800년대 이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가며, 지금 이 순간에도 미국은 한국을 관찰하고, 토론하고, 보고하고, 기록하고, 보존하고 있다. 이 비밀문서들 중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미 비밀문서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 다음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름은 김대중이다. 미국 비밀 문서 속에도 김대중 전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담겨 있다. 그 역사의 현장으로 찾아가보자.
 
 
1. 김대중 석방 및 명동 사건 : 박정희와 미국의 갈등 (1977년)
다음은 카터 행정부 때인 1977년4월 26일 미 백악관 안보담당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김대중 석방건 등 당시 한미간의 현안에 대한 카터 대통령의 지시 사항을 국무장관에게 전한 비망록 형식의 1급 비밀 문서 내용의 전문이다.
 
<김대중 석방>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2쪽 짜리의 이 1급 비밀 문서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원하는 조건을 미국이 받아들일 경우 김대중을 석방하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고, 이 부분 (본문 가운데 이탤릭 글씨체)에는 카터 대통령이 직접 쓴 '그렇게 되면 좋겠다' (will be glad to do so) 라는 자필 의견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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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망록 수신자 : 국무부 장관
 
제목 : 김대중 석방
 
대통령의 의견이 첨가된 다음 문건은, 석방 조건 (김대중 석방)으로 박(박정희 대통령)의 체면을 세워주라는 대통령의 의지가 나타나 있음. 스타이더 주한 미 대사에게도 통보하는 것이 적절할 것임.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첨부 : 문안 2번 / 백악관 워싱턴
 
1급 비밀 / 1977년 4월 26일
 
인권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태도 :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최근 스나이더 주한 미 대사에게 박 대통령의 심경을 전한 바 있음. 이에 따르면 박 대통령이 인권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바꾸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움. 김 (김종필)에 따르면, 박(박정희)은 명동 사건 관련 구속자를 석방하는 것이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것으로 비쳐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음. 그렇게 되면 반체제 인사들의 활동을 한층 더 강화시켜 '심각한 결과'를 야기시킬지도 모름.
 
그러나 최근에 박을 면담한 전직 대사 함(함병춘 주미 대사)은 대통령이 명동 사건 문제에 대해 훨씬 유연해진 자세를 보였다고 전했음.  함은 또, 김(김대중)의 석방이 단지 미국이 압력을 가한 결과가 아니라 박 정권의 강고함 때문이라는 것을 입증할 만한 방법을 서울이 찾을 수 있도록 미국이 도와주기만 한다면, 박은 김대중을 석방할 것이라고 주장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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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대중 구명을 위한 카터 대통령의 친서 (1980년) 
다음은 1980년대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내란죄로 구속 수감된 김대중 씨의 구명을 위해 카터 대통령이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 (2급 비밀)이다. 머스키 국무장관은 카터의 친서 초안을 작성해 11월 25일 백악관에 보냈고, 카터 대통령은 12월 1일 이 초안을 직접 수정했다. 별도의 굵은 글씨체는 카터 대통령이 직접 첨가해 넣은 부분이다.
 
<문서 1-1> 262p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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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하는 대통령 각하
 
    11월 10일자 각하의 친서를 잘 받았습니다. 양국간의 우의와 동맹 관계가 앞으로도 더 강화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머지않아 각하께서는 김대중씨에 대해 형(사형)을 집행할 것인지, 아니면 군사 재판이 결정한 형량을 감형하거나 또는 형취소 결정을 내릴 것인지 매우 어려운 결정을 내리시게 되리라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이번 서신에는 저의 사적인 견해를 담았습니다.
    각하에서 주지하고 계신 대로, 글라이스틴 주한 대사가 귀 정부와 상의한 이후 미 정부는 본 사건이 최근 몇 달간 재판에 계류중인 관계로 이에 대해 섣부르게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언급을 피하기 위해 지금까지 주의를 기울여왔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국제 관계에서 심각한 피해를 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미 양국의 중요한 안보 관계에 대한 미 국민의 지지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이미 위험수위에 달했습니다. 한국 야당 지도자들이 말 한마디 못한 채 투옥되거나 정상적인 정치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미국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차기 미 행정부가 (내 후임자가) 양구의 긍정적인 협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하리라고는 믿고 있으나, 김대중 씨 같은 주요 정치인을 처형하는 것은 한미 양국의 군사 경제적 관계를 근본부터 크게 위협하게 될 것입니다.
    향후 수개월간 경제와 안보 면에서 양국의 상호 관심사를 공동으로 추구할 기회가 있게 됩니다. 이 중대한 시점에 (워싱턴의 새 행정부가 출범하게 되는 시점에) 각하께서도 이런 일들이 위협받지 않기를 (손상되지 않기를 )희망하시리라 믿습니다. (중략)
    각하의 지도력은 오직 화해와 관용을 통해서만이 공고해지리라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각하께서는 김대중 씨가 각하의 경쟁자가 아니며 김대중 씨와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습니다. 따라서 각하께서 김대중 씨에 대해 감형 조치를 취하실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그런 결정은 궁극적으로 오직 각하만이 하실 수 있는 결정이라는 것을 저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국가 이익과 한미 양국의 상호 관계를 위해, 저는 군사 재판의 형 선고 취소나 감형 조치를 취해 주실 것을 강력하게 권합니다. (희망합니다)
 
지미 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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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81년 전두환 방미와 한미간 뒷거래 : "우선 김대중을 살려라" 
 
1981년 2월 카터 대통령의 연임을 막고 집권한 공화당의 신임 레이건 정권은 역시 새로 집권한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을 맞을 차비를 한다. 전두환의 방미는 한미간의 철저한 뒷거래 산물이었다. 미국 일부에서도 전두환의 방미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특히 미국 내에서 한국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 각인돼 잇는 김대중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전두환 정권을 곱게 볼 리 없었고, 적지 않은 수의 미국 내 민간 단체와 인권 운동 인사들이 김대중 구명 운동에 앞장서고 있던 상황이었다. 전두한의 방미 열흘 전인 1월 22일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가 헤이그 미 국무장관 앞으로 타전한 <레이건-전두환 회담을 위한 의제 제안>이라는 제목이 붙은 2급 비밀 전문이 이러한 양국간 타협의 내용을 담고 있다.글라이스틴 대사는 '전두환 방미의 정치적 중요성'이라는 항목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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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통령은 상당 부분 이번 방문이 김대중 사건에 대한 자신의 결정 때문에 가능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임. 그러나 그는 그이 방문이 노골적인 흥정거리로 비쳐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며, 우리가 한국의 정치 발전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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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김대중 파일>
1970년 12월 27일 윌리엄 포터 미 대사가 국무부에 타전한 비밀 전문은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 의원의 이른바 '개인 파일'이다. <김대중 이력>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비밀 전문의 내용은 김 의원의 개인 이력에서부터 정치 경력, 미국에 대한 태도와 주한 미 대사관의 김대중 의원에 대한 평가 등을 담고 있으며, 4개월 남짓 후에 치뤄질 7대 대통령 선거에서 어떤 점이 김대중 후보에게 약점으로 작용할 것인지를 분석해 놓고 있다.
 
<문서 8>첨부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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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에서의 잠재 취약점"
 
a. 초기 좌익 연루 : 김대중은 1945년 해방 직후 좌파 정치에 연루되었음. 그러나 자세한 부분에서는 언론마다 보도 내용이 다름. 한 보고서에 의하면, 김은 1940년대 후반, 전에 한때 친 공산주의자들이었던 일부 멤버들도 가담했던 보도연맹을 위해 반공산주의 연설을 행한 바 있음. 이 점을 볼 때 김은 한때 좌파에 경도되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나, 동시에 반 공산주의로 빨리 넘어왔다는 사실도 지적해 줌. (중략)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초기에 좌익에 기울었었다는 주장은 대통령 선거 운동에서 김대중에게 잠재적인 위해가 될 수 있음. 그러나 최소한 박 대통령도 똑같은 약점이 있기 때문에 민주공화당이 그 문제를 공개적으로 부각시킬 것 같지는 않음
 
b. 병역 미필 문제 : 김대중의 출생 신고서에 따르면 한국전 반발시 그는 24세였으나 한국군에 징집되지 않았음. 김은 대사관 관리에게 말하기를 자신은 단순히 소집되지 않았을 뿐이며, 따라서 징집 기피로 분류될 수는 없다고 함. 그러나 당시 부유층이나 유지급 가족의 자제가 병역 면제를 받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며, 이를 반증하지 못할 경우 국민들은 군 복무를 하지않은 것으로 간주할 것임.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직후 김대중의 참모들이 준비한 김의 이력에 따르면, 김대중은 1950년 10월 당시 '공민 해안경비대 전남 지부 부사령관'으로 되어 있음. 조사에 따르면 공민 해안 경비대는 '지역 방위와 해안 경비를 임무로 하는 비공식적 자원 단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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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후보의 미국관과 주한 미 대사관이 김 후보를 평가한 항목에는 '제한 인원만 열람 가능'이라는 비밀 분류 급수가 매겨져 있는데, 이 전문을 작성한 포터 대사는 미 대사관에서 근무한 4명의 요원이 각 시기별로 김후보를 평가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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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 '유쾌하고 지적이며 솔직하다'
1965년 : '솔직하며 독단적, 기본적으로 미국에 대해 우호적이긴 하지만 대사관 관리들과 밀접한 관계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도적으로 삼간다.'
1970년 : '진지하고 온건하며 사려 깊은 정치인으로 , 대사관과는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지 일주일 후에 작성 :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드런보이며,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고, 온건하긴 하지만 자신감에 차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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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비밀 문서로 본 한국 현대사 35장면>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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